술이 몇 가지오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다
먹고 취(醉)할진대 청탁(淸濁)이 관계하랴
달 밝고 풍청(風淸)한 밤이거니 아니 깬들 어떠리.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자연에 머물면서 한가한 생활 속에서 술을 즐기는 모습을 그린, 조선 시대의 문인인 신흠(申欽:1566～1628)의 시조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에게 있어서 술은 단지 '청주'와 '탁주' 뿐이며, 그마저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청주든 탁주든 '먹고 취하기'는 마찬가지니, 사실상 술의 종류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 더해 때마침 하늘에는 달이 밝고 바람 또한 시원하게 부니, 술을 마시기는 최적의 조건인 셈이다.
화자가 느낀 술의 효용이란 것이 단지 ‘취하는 것’일 뿐이니, 그저 술의 종류야 어떻든 ‘아니 깬’ 상태를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술을 같이 마실 수 있는 좋은 벗과 분위기에 걸맞는 음악이 있다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이 시조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옛 지식인들은 술이 풍류를 즐기는데, 빠져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생각했다. 사대부(士大夫)로서 시조를 남겼던 조선시대 문인들에게서 술을 노래한 작품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술 자체를 탐닉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반가운 벗과 함께 정을 나누는 수단으로 술이 등장하기도 한다.
때로는 울울한 심사를 달래주는 도구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 ‘한 잔 먹새그려 또 한 잔 먹새그려’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정철(鄭澈:1536～1593)의 ‘장진주사(將進酒辭)’ 또한 술을 주제로 한 ‘술노래’이다. 술이란 이처럼 풍류를 즐기는 도구이기도 하고, 가슴속에 맺힌 시름을 풀어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에도 술을 즐겼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술을 좋아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상적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사실 잠시 세상일을 다 잊고 자연을 벗삼아 술과 음악을 즐기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그런 생활이기도 하다.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한가롭게 쉬면서, 좋아하는 술을 실컷 마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바쁜 일상에 쫓겨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들은, 여유로움을 즐기며 술을 마시기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직장 일에 시달리며 마음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더 많다 하겠다.
신흠의 작품에서 말하는 청주(淸酒)는 술을 빚어 거를 때, 술독의 위쪽에 고인 맑은 술을 가리킨다. 이렇게 걸러낸 술을 소주고리를 이용하여 증류하면 바로 전통식 소주가 되는 것이다.
또한 탁주(濁酒)는 흔히 막걸리라고 하며, ‘마구 걸렀다’ 혹은 ‘함부로 아무렇게나 걸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즘은 현대식 소주에 밀려 찾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막걸리’는 옛날부터 서민들이 즐겨 마시던 술이었다.
막걸리는 흔히 ‘술 빛깔이 흐리고 탁하다’는 뜻에서 ‘탁배기’, ‘술 빛깔이 우유처럼 희다’는 의미에서 ‘백주(白酒)’, 그리고 ‘농사일에 널리 쓰는 술’이라는 의미에서 ‘농주(農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인이자 전통주 연구가인 박록담의 저서 <전통주>는 저자의 현장 조사와 발굴 활동을 근거로 꾸민 우리 전통주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이다. 각 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이의 근거가 되는 사진을 나란히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다.
이 책에서는 전통주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전통주의 특징 및 각 지방의 전통주를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고, 책의 말미에 전통주 빚는 법을 제시해 놓았다. 부록으로 술 빚는 도구와 술을 마실 때 사용하는 다양한 주기(酒器) 및 저장 용기 등을 다루고 있어, 옛 문헌을 보면서 그동안 궁금하게 여기던 술과 관련된 각종 용어들에 대해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전 시가를 전공하는 나는 수업 중에 술과 관련된 작품이 나오면, 그 속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느라 적지 않게 힘이 들곤 했다. 나조차도 우리의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그동안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던 우리의 전통주에 대해서 보다 폭넓게 알게 되었다.
저자의 정의에 의하면, 전통주란 “우리가 주식으로 삼고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주재료로 하고, 물 이외의 인위적인 가공이나 첨가물 없이 누룩을 발효제로 하여 익힌 술”을 말한다. 여기에 각종 과실 등의 첨가물을 더하여 빚으면, 그 이름과 향이 달라진다고 한다.
따라서 철에 따라 얻어지는 첨가물을 달리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종류의 술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두견주(杜鵑酒)’니, ‘송화주(松花酒)’니, ‘이강주(梨薑酒)’니 하는 술의 명칭이 바로 첨가물의 종류에 따라 붙여진 것들이다.
흔히 술 약속을 할 때 ‘약주 한 잔 하자’고 하는데, 약재를 섞어 빚은 술을 약주(藥酒)라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우리 조상들은 술을 단순한 기호 음료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통해 건강을 아울러 도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부인필지(婦人必知)>(1809년)라는 책에는 “밥은 봄과 같이 먹고, 국은 여름과 같이 먹고, 장은 가을과 같이 먹고, 술은 겨울과 같이 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민족처럼 따뜻한 밥과 뜨거운 국을 즐기는 경우, 술은 차게 해서 마셔야 음식 궁합이 맞다는 의미이다. 술을 즐기되 건강을 배려한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술에 관한 전통적인 인식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전통주를 ‘거르는 형태’, ‘제조 방법’, ‘술 빚는 횟수’, ‘제조 시기’, 그리고 술을 빚을 때 누룩과 함께 섞어 쓰는 ‘밑술 제조 방법’ 등에 따라 상세하게 분류해 놓았다. 한 가지 술을 완성하기 위해 여러 번 거듭 빚어 만드는 술의 종류가 적지 않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누룩과 함께 술을 빚는데 가장 기본적인 원료가 되는 밑술의 종류는 죽, 물송편, 구멍떡, 개떡, 인절미, 백설기, 고두밥, 범벅 등이 있다고 한다. 술을 빚을 때 밑술로 고두밥이 흔히 사용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는데, 술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밑술이 쓰인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바로 각 지역의 이름난 전통주를 소개한 부분이었다. 그동안 이러저러한 사유로 각 지방을 여행하면서, 술을 즐기는 편인 나로서는 그 지방의 전통주를 적지 않게 맛보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나의 경험을 훨씬 뛰어 넘는 다양한 종류의 각 지역 전통주가, 기능보유자의 술 빚는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전통주를 재현하려는 기능 보유자들의 노력을 강조하면서, 아울러 양주에 밀려 전통주의 존재가 점차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애정이 잘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주를 일반 사람들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제조와 판매 등에 있어 정책적인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통주는 현대식 소주와 양주에 밀려, 일반인들의 관심 영역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다양한 전통주를 쉽게 접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격 또한 보통 사람들로서는 쉽게 구입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몇몇 마니아들에게만 알려지고 소비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점이 전통주 제조업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전통주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는 것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책적인 배려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결혼하던 무렵부터 나 자신이 제철에 나는 각종 재료를 이용해, 소주를 부어 과실주 등을 담그고 있다. 지금도 창고 한편에는 여러 해 전부터 담근 각종 과실주들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술이 숙성될 즈음에는 담근 술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내 주위에는 이미 널리 알려져 학기 초에 학생들과 함께 M.T.를 가게 되면, 내가 가져오는 담금술을 기다리거나 혹은 가져오도록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는 녀석들도 적지 않다. 그러면 나는 그동안 담가두었던 여러 종류의 술을 적당히 맛볼 수 있을 분량을 챙겨, 그들의 기대에 기꺼이 부응하곤 한다. 이처럼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눠 마시는 즐거움도 술이 주는 효용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듯하다.
금년에도 지난 5월에는 집 뒷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산딸기를 따서 술을 부어 놓기도 했다. 얼마 후에 산딸기를 꺼내어 술만 다른 용기에 옮겨 두면, 내 집엔 담금술 종류가 하나 더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술을 담그면서 소주를 부어 만든 과실주가 아닌, 전통적인 방식으로 술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던 나에게는 ‘전통주 빚는 방법’을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한 이 책은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전통적인 방법으로 술을 만들 마음의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 단지 비교적 멀지 않은 미래에 나의 이러한 마음이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김용찬 기자 (chany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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